1. 내 인생과 서재
어쨌든 책은 곧 사람이니까요
서재라는 곳은, 문 열고 들어와서 사람 만나는 데죠. 어쨌든 책이 사람들인거니까요. 그래서 손에 잡히면 ‘아, 오늘은 이분하고 한번 이야기를 해보자’하는, 그런 곳입니다.
책은 덮어놓으면 무생물이지만 펼치는 순간에 생물이 되고. 또 교감까지 하면 친구가 됩니다. 덮어놓으면 작가분도 주무시고 펼치면 작가분도 깨셔야 하고. 어떤 분들은 저보다 연세 드신 분도 있고 또 저보다 아래이신 분도 있고, 알랭 드 보통이라는 분은 69년생이시니까 저하고 다섯 살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죠. 그런 분들을 만나면 성질나죠. 이 사람이 이런 책을 쓰는 동안에 난 도대체 이태까지 뭘 하고 살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팬들에게 책 선물을 많이 받는데, 책은 읽어서 돌려줄 수 있는 선물이라서 좋습니다. 제가 읽어서 말로 돌려 드리든, 다른 사람한테 돌려주든 그럴 수 있으니까요. 지인에게 빼앗아 오는 경우도 많고요. 자꾸 책은 욕심이 나서, 저녁에 라면 안 먹는다고 하고는 누가 라면 끓이면 한 젓가락 뺏어 먹고 싶잖아요? 그런 것처럼 항상 남이 읽는 책에 대해서, 어 이거 뭐지? 하면서 갖고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화 위복이 되었던 것 같아요
제 친구가 초등학교 때 장난친다고 쇠 우산 꼭지로 다리를 콱 찍었거든요. 모르고 놔뒀다가 파상풍이 왔죠. 절단 이야기까지 나와서 당시 외숙모, 외삼촌이 계시던 대구에 있는 큰 병원에 갔습니다. 다행히 절단은 말고, 다리 전체에 깁스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삼사 개월동안 꼼짝도 못하고, 학교를 못 다녔습니다. 원래 영천 아이인데 대구에 왔으니 병문안 오는 친구도 없고, 그땐 컴퓨터도 없고. TV도 낮엔 안 했으니… 그때 외숙모 집에 있으면서 사촌형들의 책방에 있던 책들을 거의 선택의 여지 없이 닥치는 대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움직일 수가 없었으니까요. 위인전집, 형들이 몰래 숨겨놨었던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죄다 읽었습니다. 그때 책 읽는 버릇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지요.
저자의 육성을 상상하여 읽어봅니다
저는 메모하면서 읽는 유형은 아닙니다. 쭉 읽는 스타일입니다. 왜냐하면 책은 어떤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책은 이미 활자화가 되어 있지만 사실은 작가가 말을 하는 것이잖아요. 저만의 방법이기는 한데, 될 수 있으면 글을 읽으면서 활자와 함께, 저자의 육성을 상상해서 읽어보는 방법을 많이 써보려고 그럽니다. 생생하게 다가올 때가 있어요.
활자가 쓱 걸어 나오는 것 같은 느낌
책 구절을 일부러 기억한다기보다는, 활자가 툭 일어나서, 쓱 걸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 구절들을 읽으면 작가분들에게 ‘와, 이런 글을 어떻게 쓰시지!’라는 경외감을 가짐과 동시에 가슴에 남죠. 굳이 외운다기보다는……머리가 그렇게 좋은 편은 못됩니다.
예를 들면, 정확하게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녁이 되면 산도 외로워서 마을로 찾아내려온다> 이런 구절은 ‘어, 나도 만날 촌에 있으면서, 그렇게 마을에 해지고 산 그림자 지는걸 보아왔지만, 어떻게 이런 표현이?’라는 느낌이 딱 들면서, 이렇게 표현하실 수 있는 작가분이 부러워집니다.
저희도 다 그런 감정이나 느낌을 가지고 있으되 표현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우리 안에 있는 걸 이렇게 글로서 형상화 시켜주시니까. 기억에 남는 구절을 써주신 분들한테 고마워해야 하겠지요.
<맑은 샘 학교 글모음> 그리고 아이들과 책
그 외에 재미있게 보는 책이요? <맑은 샘 학교, 2008년 글 모음>이 있습니다. 출판된 것은 아니고요. 맑은 샘 학교에서 엮은 책을 저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저도 아이들하고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 있고 해서, 쭉 읽어봤는데, 되게 웃깁니다. 제가 이렇게 앉아서,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느낀 단상과 자라남을 볼 수 있는 축복이, 책 아니고서 가능하겠습니까. 재미있는 거요? 엄청 많습니다. <2008년 4월 17일, 나무날, 날씨…>, 너무 더웠던 모양입니다. <말라 죽을 뻔 했다>. (웃음) 아무것도 꾸민 게 없이 툭툭 써 놓은 게 애들답잖아요.
야구는 공수와 운동장의 규격 정도가 정해졌죠. 이 정도 규제 안에서 물론 감독과 코치가 조율은 하지만, 그 안의 경기는 결국 18명의 선수가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처럼 큰 틀, 다시 말해서 공간 이외에는 규제 없이 아이들이 읽고 싶은 책,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관심을 두는 모든 책을(아주 유해한 도서만 제외하고) 읽게 하고 싶은 것이 제 마음입니다. 이 아이가 소통하고 싶은 부분과 소통하고, 읽다가 재미없으면 덮고, 어른인 저도 그렇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필독 도서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은 금서이고요. 이런 강제가 아이에게 억압과 화로 남아서는 안될 것 입니다.
노브레이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
네, 노브레이크라는 토크 콘서트를 진행하면서, 책 읽어주는 코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디어를 낸 부분이고요, 주로 <지식 e>라는 이 책에서 발췌합니다. 이 책은 단편적인 사실에 대한 단상을 많이 담고 있는데, 거기서 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구절을 만났을 때, ‘제 의견은 이러하니 여러분 의견은 어떻습니까?’ 하고 관객분들에게 말씀드려 보는 거죠. 200여 분의 관객들도 거기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주시는 것이고요. 지난주에는 이 책에 나오는 팀 버튼에 관한 이야기로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책 이야기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가 읽어서 좋은 구절이므로 소개해드리고 싶은 것이지요. 좋은 친구한테 좋은 친구 있으면 서로 연결해주고 싶잖아요. 그게 이성이든 동성이든 말이에요.
2. 내 인생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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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자화전 (지만지고전천줄163)(양장)
- 제아미 | | 지만지고전천줄
- 이것은 예능에 관련된 책입니다. 회사 대표님이 ‘너는 이걸 한 번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라며 소개해주셔서 읽게 되었습니다. 예능이라고 해서, 지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아니고요, 일본의 ‘노’(能)라는 일종의 전통문화에 대한 책입니다. ‘노’(能)에서 나이대별로 수련해야 되는 요소들, 갖가지 수련 방법들, 그리고 일어날 수 있는 마음의 혼돈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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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 | 이레
- 사실은 여행을 빌미로 자기가 하고 싶은 문화, 예술, 종교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놓은 책입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아! 그렇구나!’했던 부분은, 공항에 갔을 때, 도시 이름이 타라라락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때 사실은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을 이미 느끼고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가기 전에는 ‘아, 파리 가면 뭐하지~?’라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가보면 고생입니다. 그렇죠? 상상할 때 이미 여행의 모든 즐거움을 거의 경험한다는 부분에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이처럼 여행에서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큰 기쁨들을 세세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이 책이 좋았고요 그리고 여러 가지 예술 작품들을 이 책 덕분에 알게 되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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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해
- 허영만 | 김영사
- 이 책은 제가 무척 좋아해서, 제가 자주 가는 막걸리 집에서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달라고 해서 가져왔죠. <사랑해>, 이거는 여러분이 저보다 훨씬 더 잘 아시겠지만, 불후의 명작입니다. 저는 허영만 선생님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이 책을 펼치면 ‘활자 사이로 코끼리가 한 마리 가고 있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코끼리- 김춘수’ 이런 인용 글들이 있고, 보통 이런 글들로 마무리가 됩니다. 제가 여러 번 고백했듯이 너무 좋은 말들이어서, 이를 사용했던 적도 많고요.
단편들이 엮어져 있는데 ‘지우’라는 꼬마 아이의 예쁜 모습도 좋고요. 저는 무엇보다도 ‘철수’와 ‘영희’라는 이름이 좋습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철수’와 ‘영희’가 갖는 보편성과 같은 감정들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보편적인 이야기가, 보편적인 이름을 통해 보였기에 더 거리감 없이 보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유치한 이야기도 있지만, 유치한 게 또 사랑이고요. 가장 일상적이면서 가장 특별한 것, 가장 웃기면서 가장 진지한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만화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너무나 좋습니다.